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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년 7월 14일 - 1918년 2월 6일

미술이 격동하던 19세기 말에 장식 회화가로 교육받았으나 곧 건축 장식회화에서 탈피하여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게 된다. 젊은 시절에는 사실적인 회화에도 능하였으나 점점 더 평면적이지만 장식적이고 구성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화풍 뿐만 아니라 대학 회화라고 불리우는 일련의 문제작들에서 특유의 반항적/회의적 주제의식을 보여줘 큰 비난과 함께 명성을 얻은 바 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 모더니즘 계열의 미술이 빠르게 기존 회화 경향을 대체하였고, 클림트의 이후의 작가들은 더 이상 클림트와 같은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된다. 너무나도 유명하지만, 그 이전의 전통과도 다르면서 훗날의 미술과도 다른 고립된 섬과 같은 위치에 있는 작가.

 

14살 때인 1876년에 빈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한 이후 장식 회화가로 교육받았다. 1883년에 졸업하고 동생 에른스트 클림트, 동료인 프란츠 마치와 함께 공방을 세우고, 이후 건축물 벽면의 회화 작품 등을 제작한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지극히 전통적인 사실적 화풍을 보여주었다. 이후 초상화나 우의화 등 장식과 독립된 작품 활동을 하면서 점점 자신만의 화풍을 발전시키게 된다.

 

19세기 말에 영국, 프랑스 등에서 벌어진 인상파와 같은 진보된 아방가르드 미술 운동들을 접하게 되고, 상대적으로 낙후된 오스트리아의 미술 경향과 미술 협회의 보수성에 반발하게 된다. 이후 반 아카데미즘 운동을 하면서 1897년 빈 분리파(제체시온;Secession)를 결성하고 아르누보 미술의 거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후 구스타프 클림트는 결별했던 동료인 마치와 함께 빈 대학교 대강당의 천장의 패널화를 의뢰받게 되는데, 그가 의뢰받은 부분은 대학의 철학, 의학, 법학을 상징하는 부분이었다. 클림트가 그린 3점의 대학 회화는 화풍 역시 기존 건축물의 패널화와 달랐지만, 그 그림이 담고 있는 주제 때문에 관계자들을 격분시켰다. 마치 인간이 우주의 이치를 알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존재이며, 인간은 삶에서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정의보다는 고통과 무질서가 더 가까이 있는 것처럼 해석되는 그림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클림트의 학력을 문제삼으며 그에게 너무 벅찬 주제라는 비난이나, 빈 대학교의 교수진 87명이 철학을 반대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으며, 반대로 당시 교육부 장관이 클림트를 옹호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키스>

 

 

 <유디트>

 

<유디트 II (살로메)>

개인적으로 크림트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고, 제일 먼저 접한 작품이다.

 

<다나에>

<성취>

 

<사랑>

 

클림트의 작품들 중 내게 의미있는 작품들이다.

작품에 빠져든다고 할까...

감상하는 중에 많은 것들을 생각나게 한다.

 

잊혀진 것,

잊고싶은 것,

희미해진 것

 

조용한 곳에서 오랫동안 들여다보며 그 생각들을 되새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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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lk R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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