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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람 이 어 라 Silk R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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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영화 개봉 얼마전 인터넷에 뿌려진 예고편을 통해서였다.

예고편을 봤지만 그렇게 보고 싶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뻔한 민주화 쉬이 영화겠지 싶었다.


80년 5월 어린 꼬꼬마였던 나는 광주에 있었다.

전남 도청에서 차로 15분 정도 거리의 마을에 살고 있었다.

어렸지만, 난 그 날의 일들을 조각조각 기억하고 있다.

광주 지원동 어느 2층 주택.

어머니, 외삼촌, 여고생이었던 이모 그리고 꼬꼬마 나.

그 날이 있기 몇일 전 동내 사람들 사이에 전쟁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졌고,

어머니는 만일을 대비해 비상물품들을 사야겠다며 나와 함게 동내 슈퍼에 갔었다.

양초, 성냥, 화장지, 라면 2박스, 통조림 등등....


그리고 그 날.........(그 날이 정확히 몇일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외삼촌은 친구 배웅을 위해 공용터미널(시외버스터미널)에 슬리퍼 차림으로 나갔고,

"주부" 어머니와 "여고생" 이모님은 "집 안"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간쯤에 의자 2개를 들고 올라가 바람을 쐐며

함께 가지고 간 과일을 드시고 있었고, 꼬꼬마였던 나는 방 안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되었다.

(삼촌을 통해 들은 이야기로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친구 배웅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려던 외삼촌은 갑자기 군인들이 잡으려 달려드니 슬리퍼 차림으로 냅다 달렸다고 한다. 당시 외삼촌은 최민수 풍의 외모와 발군의 운동신경으로 체력에 자신있는 사람이었지만 그 때 만큼은 그냥 도망가야겠다 싶었다더라. 당연한거겠지...

도망치다 도망치다 조선대학교 뒷 산으로 올라 도망가면서 돌고돌아 집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주부" 어머니와 "여고생" 이모님은 "집 안"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간쯤에 의자 2개를 들고 올라가 함께 가지고 간 과일을 드시고 있었는데 그 때 그 두 분 사이로 총성과 함께 총알이 지나갔다.

다시 말하지만, 주부와 여고생이 집 안 계단 중간에서 과일 먹다 생긴 일이다.

두 분은 "엄마야~~" 소리와 함께 의자나 과일 쟁반은 커녕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후다닥 집 안으로 들어오셨다.

그리고 방 안 한 구석에 꼬꼬마인 나를 밀어 앉히고 농(가구)에서 두꺼운 이불을 꺼내 날 뒤덮듯 덮으셨고,

그 위를 여고생인 이모님이 품듯 끌어안았고 어머님은 그 위를 다시 다른 이불로 감추듯 덮으셨다.

그리고 어머님도 다른 이불 하나를 뒤집어 쓰시며 이모님 위를 감싸듯 품었다.


암흑 속에 들려오는 것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뿐.

한 무리의 사람들 소리가 와~~~~하고 들려오더니 점점 멀어져갔다.

짐작으로 용화정사(절 이름) 쪽 산(언덕) 쪽으로 멀어져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2, 3분 뒤 타탕, 타다다다닷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와~ 하는 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그런 일이 몇번인가 반복 되었다.

난 어린 마음에 무서움 보다도, 이게 무슨 상황이지 하는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그냥 그렇게 그 날 밤을 지새웠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잠들었다가 일어나 보니 외삼촌은 집에 돌아와 계셨고,

어머니는 문을 열지 않고 조용히 식사를 준비해서 나를 먹이셨다.

한 참이 지나도록 조용하자 외삼촌이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와 담 너머를 살펴보셨고,

나도 따라 나가봤다. 동내에 내 친구 꼬꼬마들이 한 둘 보였다.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에 나도 나가봤다.

바닥이 핏자국이 보인다. 탄피를 주은 녀석도 있었다.

당시 동내 슈퍼는 직사각형 철판으로 지금의 셧터 처럼 가게 문을 닫을 때 밖에 3, 4개로 막아서 덧대어 두는데 그 양철에 총알구멍 몇개가 보여 내가 그곳에 손가락을 넣었다 뺐다 한 기억이 난다.



그렇게 그 날이 지나고 시간이 흘러 광주에서는 종종 시위가 있었고,

도청에서 가까웠던 우리 동내,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초등학교) 근처에서는 자주 최루탄 냄새 때문에 고생을 했다.

목이 맵고, 눈물이 났으나 외삼촌은 절대 손으로 눈을 비비지 말고 그냥 울면서 집에 와서 세수하라셔서 그렇게 울며 집에 온 날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어린 아이도 그렇게.....



시위대들이 외치는 것을 들어보면 "전두환 노태우 물러가라~"였는데, 

그렇게 시위를 했어도 전두환 뒤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다.

어린 마음에 화가 났었다.

그렇게 시위를 해도 뭐 바뀌는 것도 없고, 그렇게 바꾸고 싶으면 지들이 공부 열심히 해서 높은자리 가서 바꾸면 될것 아냐...라는 생각을 (자주 최루탄 때문에 고생해서인지) 그 때부터 했던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던가, 중학생 때 였던가...

광주 한미쇼핑이라고 불렸던 건물 근처(인지 터미널 근처였든지 기억이....)를 지날 때 518 희생자 사진이라고 길거리에 전시되어 있을 것을 봤다.

지금 인터넷에 돌고있는 그 처참한 사진... 그 사진들이었다.

어린 눈에 얼마나 충격이었겠는가.

당시 내 심정은....................................................무서웠다. 

그래 난 무서웠다.



그래서 난 광주 518 관련 영화를 일부러 피해왔다. 어쩌면 외면일지도 모르겠다.

광주시민이었던 사람으로서 당연히 분개하고 지인들에게 알리기도 했지만,

이를 소재로 한 영화는 안보고 싶었다.

그래서 "화려한 휴가"도 "택시운전사"도 아직 볼 수 없었다.

송강호를 좋아해서 "택시운전사"는 꼭 보고 싶어 영화를 구해놓고도 난 아직 그 영화를 열어볼 수가 없었다.



오늘 본 이 영화 "1987"은 80년 광주가 나오지 않을꺼라 생각해서, 또 세간의 평가가 좋아서 뒤늦게 영화관을 찾았다.

그리고 난 몸을 부르르 떨며 눈물을 참지 못하고 흘려버렸다.

주변 다른 관객들은 별 반응이 없었던 장면.

대학 만화동아리실에서 80년 광주의 진실을 알려주겠다며 비디오를 틀어주었고, 영화 속 TV화면에서 계엄군에게 몽둥이를 얻어맞는 시민들이 나오는 그 장면이 나오면서부터....

그 장면이 흐름상 그렇게 슬픈 장면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난 그 장면에서 몸을 부르르 떨며 눈물이 나오는 것이었다.

왜지? 왜 내가 울고 있는 것이지? 

더 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닦아내면서도 계속 그 생각을 했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세상은 우리 세대를 X세대라고 불렀다.

오렌지족이라는 사회용어가 나왔다.

세상은 우리 세대를 이렇게 평했었다. 

이 세대는 전쟁을 모르는 부모 세대 품에서 자랐으며,  부모 세대가 알았을 배고픔도 모르고 큰 세대이며,

풍요속에서 소비문화에 익숙한 해방 이후 존재한 적이 없는 문화적 풍요를 누린 세대라고...



그럴지도 모르겠다.

부자집 도련님으로 자라지는 않았지만, 부모님이 어릴적 겪으셨다던 배고픔은 겪지 않고 자란 것은 사실이다.

어린 시절 빈 병, 폐종이, 고철을 모아 팔았지만 그것은 생계를 위해서가 아닌 엿이나 다른 과자를 사기 위해서였다.

대학 입학전 집회, 시위하는 대학생 형, 누나들을 보면서도 응원보다는 비판적이었다.

때문에 입학 후 운동권 선배들의 권유에도 분명하게 선을 그었었다.

내가 1학년일 때 군제대 후 복학해서 4학년 졸업반에 걸쳐 있던 80년대 끝자락 선배들의 모습들은 뭐랄까 요샌말로 루져처럼 보였었다.  당시 내 눈에 비췬 그들은 술에 취해 있을 때가 많았고, 수업에 열의가 있지도 않았었다. 시국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지만 열정을 잃고 좌절적인 분위기......... 


그 땐 몰랐었다.

그들이 어떤 시간을 보내고 그 때의 그 모습에 이르게 되었었는지....

몇일전 썰전에서 유시민, 박형준, 우상호 3 사람이 전두환 이후 노태우로 바뀌면서 민주화를 갈망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야, 그제서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감히 내가 뭐라고.... 오만하게....




시간이 흘러 경기도 안산에 살며 세월호 참사 뉴스를 접했다.

화랑유원지에 분향소가 세워졌다는데 그런 사회적인 문제에 한번도 참석하지 않고 살았던 나조차도 도저히 안가볼 수가 없는 마음이 들었다. 더구나 나는 제주에서 1년 생활을 마치고 그 배로 인천에 온 적이 있었고, 참사가 있던 그 해 연휴에 가족과 함께 그 배에 차를 싣고 여행가자고 가족들과 계획도 세워뒀던터라 더더욱 남일 같지 않았다.



촛불집회......... 계속해서 나오는 뉴스 보도.

저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 아니 이게 나라냐를 외치고 있었다.

한 번은, 아무리 못해서 한 번은 저 곳에 참석해야 나중에 아이들에게 할 말이 있을것 같았다.

그래서 참석했다고 말하기도 뭣하지만, 가서 촛불을 든 한 명이 되어 봤다.


사회적으로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분향을 세월호 참사 때 처음 해봤고,

정부에 대해 반대 목소리를 내는 집회를 촛불 때 처음 해봤다.

만약 이런 경험이 없이 이 영화 "1987"을 만났다면 지금의 이 느낌과 같았을까?




영화가 끝나고 일어날수가 없었다.

영화가 끝난 뒤 이렇게 마음 무거웠던 적이 없었다. 역시 처음 겪어본 일이다.



미안했다.

미안했다.

지날 날 선배들을 루져라고 생각했던 내 자신이 한심하고 부끄러웠다.


그리고 고마웠다.

지금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대통령 선거 때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는 세상....을 우리는 저들의 피와 죽음의 희생 위에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당연하게....



이 영화를 잘 만들어 준 감독과 배우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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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lk R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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