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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람 이 어 라 Silk R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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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 가우디 이코르네트

(1852년 6월 25일 - 1926년 6월 10일)

 

내부 장식과 색, 빛이 조화를 이룬 건물들을 건축했다. 에는 사회적, 문화적으로 대단한 변화가 있었다.

가우디는 당시 카탈루냐 건축을 주도했던 고전주의 건축을 벗어나, 건조한 기하학 만이 강조된 건축이 아닌

나무, 하늘, 구름, 바람, 식물, 곤충 등 자연의 사물들을 관찰했고,

그런 형태들의 가능성에 관하여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 결과 그의 건축물은 기하학적인 형태들 외에도 곡선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내부 장식과 색, 빛이 조화를 이룬 건물들을 건축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밀라 주택, 바트요 주택, 구엘 저택, 구엘 공원,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등을 설계했다

 

[밀라 주택]

 

 

[바트요 주택]

 

 

[구엘 저택]

 

 

[구엘공원]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그의 건물 중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은 현재까지 모두 7 작품이다.


1.비센스 주택 1878-1880
2.구엘 저택 1885-1889
3.구엘 공장단지 내 지하경당 1898-1914
4.구엘 공원 1900-1914
5.바트요 주택 1904-1906
6.밀라 주택 1905-1910
7.성가족성당 탄생 입면 및 지하경당 1884-1926

 

그 중 구엘저택과 밀라주택, 성가족성당은 각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을 수 있으며,

바르셀로나에 있는 성가족 성당은 아직도 건축 중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 터키에서 자랐다고 하는 가우디는 그의 건축물에 기존의 서양 건축물과는 다른 이국적인 느낌이 있는데,

어려서 터키에서 본 건축물(이슬람 건축에서 온 기하학무늬)에 대한 영향이 있지 않나 하는 추정을 하는 사람도 있다.

 

당시의 바르셀로나는 산업혁명 이후 급격히 성장한 개발도시이자 무역도시였다.
스페인 내에서 가장 잘 사는 도시이자 유럽대륙의 문물을 가장 빨리 받아들이던 개방적인 도시였던 점 또한 가우디의 건축물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겠다.

 

그리고 위 사진들을 보다보면 "구엘 주택, 구엘 공원"이 있는데, "구엘"은 사람 이름이다.

졸업을 목전에 둔 가우디가 ‘졸업작품’과 같은 의미로 유리 전시장을 제작했는데,

파리에서 이를 우연히 본 거부 ‘에우세비 구엘’(Eusebio Guell Bacicalupi, 초상화)은 가우디의 사무소를 직접 찾아온다.

구엘은 벽돌회사 사장이자, 아메리카와의 무역으로 떼돈을 번 사업가다. 구엘은 높은 수준의 작품과 건물을 수집하는 사람이었는데 한눈에 가우디를 알아보고 가우디의 클라이언트이자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네 마음대로 지어봐라’라며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가우디가 구엘을 위해 처음 지은 건물은 “구엘 궁전”이다. 이름은 궁전이지만 지대가 좁았다.

18m × 22m로 120평이 좀 안 되는 넓이다. 기둥을 제외하면 전용면적은 80평이 안 될 수도 있다.

여기서 (클라이언트를 위한) 가우디의 유저빌리티가 빛을 발한다.

가우디는 집 어느 곳이라도 빛이 흐르도록 천장에 ‘빛의 우물’을 뚫었고, 통행에 방해되는 칸막이나 기둥을 없애버렸다. 결과적으로 구엘 궁전은 실평수가 매우 큰 집이 됐다. 동시에 몽환적이고 동화적인 파사드를 세워 구엘의 간지를 세워준다.

 

[현수선]

현수선(懸垂線, Catenary)은 물리학과 기하학에서, 밀도가 균일한 사슬이나 케이블 따위가 양끝 부분만이 고정되어 그 자체 무게만으로 드리워져 있을 때 나타나는 곡선이다. 쌍곡코사인 함수로 나타낼 수 있으며, 수학적으로는 상당히 다르지만 포물선과 비슷해보여 혼동될 수 있다. 특정한 아치 설계에서도 사용되는 모양이다. 평행한 두 원형 링에 비누막을 쳤을 때 나타나는 곡면을 현수면이라고 하는데, 이를 중심축 방향으로 자른 선이 또한 현수선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설계 시, 현수선 기법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가우디와 피카소]

가우디는 이렇게 저택들을 지으며 ‘부자만을 위해 일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실제로는 저렴한 비용으로 수녀원을 짓기도 했다) 특히 젊은 예술가들에게 비난을 받곤 했는데, 그 비난의 선두에 선 것이 젊은 화가 피카소였다.

그러나 결국은 피카소도 타일을 깨뜨려 다시 모자이크하는 가우디의 ‘트렌카디스’(trencadis) 작법에 영향을 받았다. 트렌카디스와 피카소 작품의 유사성은 그림만 봐도 느껴진다. 인간에 대해서는 비난했으나 예술에 대해서는 비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죽음에 대한 에피소드]

1918년 부터는 자신이 평생동안 건축해온 성가정 (성가족) 대성당 건설에 매진했지만 재정 문제로 인해 끝을 보지 못하고,

1926년 6월 7일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집으로 가던 길에 지나가던 노면 전차에 부딪혀 치명상을 당했다.

그러나 운전수는 지저분한 노숙인으로 생각하고 그를 길 옆에 팽개치고 노면 전차를 몰고 가버렸다. 사람들이 병원으로 데려가고자 택시를 찾았지만 역시 노숙인으로 생각한 기사들은 그냥 지나쳐 3번의 승차 거부 끝에 4번째로 잡은 택시 운전수가 겨우 운전했지만 병원도 2곳이나 진료 거부를 당해 빈민들을 구제하기 위한 무상 병원에 놔두고 가버렸다고 한다.

문제는 신분을 증명하는 것인데 병원에서 방치된 채로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가우디는 병원 간호사에게 이름을 말하자 병원 관계자들은 경악을 하며 가우디의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급히 연락했다고 한다. 서둘러 달려온 그들이 다른 병원으로 옮기자고 말했지만 가우디는

 

"옷차림을 보고 판단하는 이들에게 이 거지같은 가우디가 이런 곳에서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게 하라.

그리고 난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다가 죽는 게 낫다"

 

라며 그대로 빈민 병원에 남았고 결국 1926년 6월 10일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를 죽게 만든 노면 전차 운전수는 파직과 동시에 구속되었으며, 승차를 거부한 택시 운전수 3명도 불구속 입건되었다.

결국 택시 운전수 3명과 그의 치료를 거부했던 병원은 막대한 배상금을 가우디 유족에게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장례식은 1926년 6월 13일 많은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고, 유해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가 남긴 기록물로는,

20대에 그가 직접 7년간 사용했던 노트 한 권과, 장식예술 박람회의 관람하고 나서 잡지에 기고한 비평의 기사글, 개인적인 서신들이 고작이다. 건축적 내용을 담은 기록물로는 20대 가우디의 노트가 유일하다. 건축가 가우디의 건축적 고민들을 엿볼 수 있는 그의 노트는 <장식>이라는 이름으로 2014년 처음 우리말로 정식 번역되었고, 2015년에는 가우디의 애석한 죽음을 기리며 그의 동료들이 쓴 최초의 가우디 전기가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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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lk R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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