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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람 이 어 라 Silk R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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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자신의 디자인 기술을 자동차, 장신구, 그리고 가구에서도 시도했으며, 그의 디자인에 대한 열정은 평범한 전자기기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아이브는 현재까지 22년이 넘게 애플과 함께 일하고 있다. 당신은 그가 다음에는 그의 어떤 혁신적인 디자인을 이끌어낼지 알지못할 것이다.

 

애플의 디자인을 아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며 흔히 떠올리는 단어가 바로 혁신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혁신이 우리에게 현시대를 살아가는 데에 있어 편리함을 주었다면, 과연 실제로 그 혁신을 실현하고 있는 디자이너들에게는 어떤 철학과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여기, 바로 그 유명한 혁신적인 디자인의 중심에 서있는 조나단 아이브가 있다.

 

 

_note. “디자인은 곧 실현이다.”

 

 

조너선 아이브 / 1967년생 (51) / 영국 출생 / 1992년 애플 입사

 

 

그가 애플에 입사할 때 애플의 수장은 스티브 잡스가 아닌 존 스컬리였다.

입사 초 그는 애플 내에서 주목받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입사 후 5년째 되던 해,

1997년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 돌아오고 그가 디자인한 아이맥 G3가 출시되면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

 

사실 잡스가 애플에 복귀했을 당시 아이브는 디자인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당시 CEO 길 아멜리오 체제에 불만을 품고 퇴사를 결심한 상태였다. 잡스 역시 외부 디자이너 고용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아이브와 대화를 나눈 후 서로의 디자인 철학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그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게 된다. 그 결과 잡스는 아이브와 디자인 팀의 사내 권한을 확대하여 기존의 엔지니어가 기기를 설계하면 디자이너가 그에 맞춰 외형을 구상하는 일반적인 디자인 프로세스를 뒤집어 디자인이 제품 설계의 중심에 자리하게 만들었다. 이런 디자인 중심 문화는 파워 맥 G4 큐브의 발열이나 아이폰 4의 안테나 게이트 같은 기능적 문제들을 야기하기도 했지만 아이브가 산업 디자인 역사에 남을 제품들을 설계하는 배경이 된다.

 

 

 

 

 

[디자인]

"미니멀리즘" 이 한 단어로 대표될 수 있다. 애플에서 디자인한 모든 것들에 그의 디자인 철학이 들어가 있다.

그의 디자인 철학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더이상 뺄것이 없는 디자인"이다.

정말 필요한 최소한의 기능만을 남기고 과감하게 모두 빼버리는 디자인을 추구한 것이다.

 

 

뉴턴 메시지 패드 같은 군더더기 없는 PDA부터 시작해서 최초의 아이맥인 아이맥 G3, 아이팟, 아이폰 같은 미니멀리스틱한 디자인 역시 마찬가지.

 

 

이 미니멀리즘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일화로 다른 기업들은 하나의 기능이라도 더 넣고 싶어할 때 조니 아이브의 디자인팀은 기능을 제거하는 것을 생각했다고 한다.
  단, 미니멀리즘한 디자인과는 반대되게 어떤 요소를 끼워넣기도 하는데 아이맥 G3, 아이북 G3의 손잡이 같은 경우가 그런 경우이다. 이 손잡이는 기기에 좀 더 친근감을 주기 위한 디자인이었다고 한다. 특히 아이맥 같은 경우는 한번 자리를 두면 딱히 옮길 일이 없는 데스크톱임에도 이 손잡이는 그가 의도한 대로 먹혀 들어가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승진]

애플의 디자이너에서, 디자인팀장으로 그 후 승진을 거듭하여 애플 선임부사장에 오른 뒤,

2015년 최고디자인책임자(CDO)에 오른다.

전세계 시가총액 제1위 기업 애플에서 팀 쿡 최고경영자(CEO)에 이어 2인자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아이브는 CDO로서 애플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디자인 팀을 계속 이끌게 되지만, 일상적 관리 업무 책임 중 일부는 올해 7월 1일자로 부사장(VP)급 임원들에게 넘겼고,

이에 따라 하드웨어·소프트웨어 디자인 부문의 관리 업무는 7월 1일부터 각각 리처드 하워스 산업디자인 담당 부사장과 앨런 다이 사용자 인터페이스 디자인 담당 부사장에게 위임되었다.

 

2017년 다이슨 창립자 제임스 다이슨의 후임으로 왕립예술대학(RCA) 총장(Chancellor)에 지명되었다. 임기는 201771일부터 5년으로 알려졌다. 제임스 다이슨은 Provost라는 직함으로 학교를 대표했는데, 아이브는 학교 행정을 적극적으로 총괄하기보다는 자문과 의전에 비중을 두고 본업인 디자인에 집중할 것으로 예측된다고 한다.

 

2018년 초, 애플의 디자인 팀으로 복귀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새로 시공되는 애플 파크에 집중하기 위해서 거의 2년간 애플의 디자인 업무에는 임하지 않았다는 것. 이에 많은 사람들은 "그래서 이런 일들이 있었던 거구나"라며 납득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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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내용이 나오게 된 배경은,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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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좀비물을 좋아하는데 기대된다.

게다가 현빈, 장동건이라니....

조우진, 김의성과 같은 조연들의 책임이 막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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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 가우디 이코르네트

(1852년 6월 25일 - 1926년 6월 10일)

 

내부 장식과 색, 빛이 조화를 이룬 건물들을 건축했다. 에는 사회적, 문화적으로 대단한 변화가 있었다.

가우디는 당시 카탈루냐 건축을 주도했던 고전주의 건축을 벗어나, 건조한 기하학 만이 강조된 건축이 아닌

나무, 하늘, 구름, 바람, 식물, 곤충 등 자연의 사물들을 관찰했고,

그런 형태들의 가능성에 관하여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 결과 그의 건축물은 기하학적인 형태들 외에도 곡선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내부 장식과 색, 빛이 조화를 이룬 건물들을 건축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밀라 주택, 바트요 주택, 구엘 저택, 구엘 공원,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등을 설계했다

 

[밀라 주택]

 

 

[바트요 주택]

 

 

[구엘 저택]

 

 

[구엘공원]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그의 건물 중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은 현재까지 모두 7 작품이다.


1.비센스 주택 1878-1880
2.구엘 저택 1885-1889
3.구엘 공장단지 내 지하경당 1898-1914
4.구엘 공원 1900-1914
5.바트요 주택 1904-1906
6.밀라 주택 1905-1910
7.성가족성당 탄생 입면 및 지하경당 1884-1926

 

그 중 구엘저택과 밀라주택, 성가족성당은 각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을 수 있으며,

바르셀로나에 있는 성가족 성당은 아직도 건축 중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 터키에서 자랐다고 하는 가우디는 그의 건축물에 기존의 서양 건축물과는 다른 이국적인 느낌이 있는데,

어려서 터키에서 본 건축물(이슬람 건축에서 온 기하학무늬)에 대한 영향이 있지 않나 하는 추정을 하는 사람도 있다.

 

당시의 바르셀로나는 산업혁명 이후 급격히 성장한 개발도시이자 무역도시였다.
스페인 내에서 가장 잘 사는 도시이자 유럽대륙의 문물을 가장 빨리 받아들이던 개방적인 도시였던 점 또한 가우디의 건축물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겠다.

 

그리고 위 사진들을 보다보면 "구엘 주택, 구엘 공원"이 있는데, "구엘"은 사람 이름이다.

졸업을 목전에 둔 가우디가 ‘졸업작품’과 같은 의미로 유리 전시장을 제작했는데,

파리에서 이를 우연히 본 거부 ‘에우세비 구엘’(Eusebio Guell Bacicalupi, 초상화)은 가우디의 사무소를 직접 찾아온다.

구엘은 벽돌회사 사장이자, 아메리카와의 무역으로 떼돈을 번 사업가다. 구엘은 높은 수준의 작품과 건물을 수집하는 사람이었는데 한눈에 가우디를 알아보고 가우디의 클라이언트이자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네 마음대로 지어봐라’라며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가우디가 구엘을 위해 처음 지은 건물은 “구엘 궁전”이다. 이름은 궁전이지만 지대가 좁았다.

18m × 22m로 120평이 좀 안 되는 넓이다. 기둥을 제외하면 전용면적은 80평이 안 될 수도 있다.

여기서 (클라이언트를 위한) 가우디의 유저빌리티가 빛을 발한다.

가우디는 집 어느 곳이라도 빛이 흐르도록 천장에 ‘빛의 우물’을 뚫었고, 통행에 방해되는 칸막이나 기둥을 없애버렸다. 결과적으로 구엘 궁전은 실평수가 매우 큰 집이 됐다. 동시에 몽환적이고 동화적인 파사드를 세워 구엘의 간지를 세워준다.

 

[현수선]

현수선(懸垂線, Catenary)은 물리학과 기하학에서, 밀도가 균일한 사슬이나 케이블 따위가 양끝 부분만이 고정되어 그 자체 무게만으로 드리워져 있을 때 나타나는 곡선이다. 쌍곡코사인 함수로 나타낼 수 있으며, 수학적으로는 상당히 다르지만 포물선과 비슷해보여 혼동될 수 있다. 특정한 아치 설계에서도 사용되는 모양이다. 평행한 두 원형 링에 비누막을 쳤을 때 나타나는 곡면을 현수면이라고 하는데, 이를 중심축 방향으로 자른 선이 또한 현수선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설계 시, 현수선 기법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가우디와 피카소]

가우디는 이렇게 저택들을 지으며 ‘부자만을 위해 일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실제로는 저렴한 비용으로 수녀원을 짓기도 했다) 특히 젊은 예술가들에게 비난을 받곤 했는데, 그 비난의 선두에 선 것이 젊은 화가 피카소였다.

그러나 결국은 피카소도 타일을 깨뜨려 다시 모자이크하는 가우디의 ‘트렌카디스’(trencadis) 작법에 영향을 받았다. 트렌카디스와 피카소 작품의 유사성은 그림만 봐도 느껴진다. 인간에 대해서는 비난했으나 예술에 대해서는 비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죽음에 대한 에피소드]

1918년 부터는 자신이 평생동안 건축해온 성가정 (성가족) 대성당 건설에 매진했지만 재정 문제로 인해 끝을 보지 못하고,

1926년 6월 7일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집으로 가던 길에 지나가던 노면 전차에 부딪혀 치명상을 당했다.

그러나 운전수는 지저분한 노숙인으로 생각하고 그를 길 옆에 팽개치고 노면 전차를 몰고 가버렸다. 사람들이 병원으로 데려가고자 택시를 찾았지만 역시 노숙인으로 생각한 기사들은 그냥 지나쳐 3번의 승차 거부 끝에 4번째로 잡은 택시 운전수가 겨우 운전했지만 병원도 2곳이나 진료 거부를 당해 빈민들을 구제하기 위한 무상 병원에 놔두고 가버렸다고 한다.

문제는 신분을 증명하는 것인데 병원에서 방치된 채로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가우디는 병원 간호사에게 이름을 말하자 병원 관계자들은 경악을 하며 가우디의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급히 연락했다고 한다. 서둘러 달려온 그들이 다른 병원으로 옮기자고 말했지만 가우디는

 

"옷차림을 보고 판단하는 이들에게 이 거지같은 가우디가 이런 곳에서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게 하라.

그리고 난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다가 죽는 게 낫다"

 

라며 그대로 빈민 병원에 남았고 결국 1926년 6월 10일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를 죽게 만든 노면 전차 운전수는 파직과 동시에 구속되었으며, 승차를 거부한 택시 운전수 3명도 불구속 입건되었다.

결국 택시 운전수 3명과 그의 치료를 거부했던 병원은 막대한 배상금을 가우디 유족에게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장례식은 1926년 6월 13일 많은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고, 유해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가 남긴 기록물로는,

20대에 그가 직접 7년간 사용했던 노트 한 권과, 장식예술 박람회의 관람하고 나서 잡지에 기고한 비평의 기사글, 개인적인 서신들이 고작이다. 건축적 내용을 담은 기록물로는 20대 가우디의 노트가 유일하다. 건축가 가우디의 건축적 고민들을 엿볼 수 있는 그의 노트는 <장식>이라는 이름으로 2014년 처음 우리말로 정식 번역되었고, 2015년에는 가우디의 애석한 죽음을 기리며 그의 동료들이 쓴 최초의 가우디 전기가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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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계는 샤넬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코코 샤넬. 프랑스의 복식 디자이너이자 세계적인 패션 아이콘.

본명은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Gabrielle Bonheur Chanel). 메종 샤넬의  설립자이다.

코코 샤넬은 가난하던 시절 변두리 술집에서 노래 부르고 하던 시절에 사람들이 부르던 애칭이었다.

원래의 본명은 가브리엘 샤넬이었다고 한다. 코코 샤넬은 이 예명이 좋아 자신을 '코코'라고 부르는 게 참 좋았다고 한다.

 

 

샤넬은 여성복에 대한 유럽의 전통, 코르셋을 많이 이용하던 1910~1920년대의 여성복에 대해 왜 여자들은 비실용적인, 쓸모없는 복장을 고수해야 하는지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초경을 시작하기 이전의 여자아이에게는 무릎 길이의 치마를, 초경을 시작하여 성인 여성으로서의 대우가 시작되면

발등까지 덮는 긴 치마를 입는 것. 이것은 동서남북을 막론한 유럽의 오랜 전통이었다.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반에 촬영된 유럽 각국 왕실이나 귀족들이 남긴 전신 사진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역으로 남자의 경우 어린 남자아이 혹은 어린 소년에게만 반바지를 입혔고, 그가 노동력과 분별력을 갖춘 성인 남성으로 성장해야 긴 바지를 입는다. 요즘은 많이 없어졌지만 유럽 남성들이 편하다는 이유로 툭하면 반바지를 입는 미국 성인 남성들을 비웃던 시선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 여담이지만 어린 남자아이에게 반바지를 입히는 전통은 이후 한창 근대화를 추진하던 일본으로 건너가 한겨울에도 반바지를 입는 관습이 생기게 되었다.

 

샤넬은 당시 애인이던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고향 영국에서 신사복의 소재를 여성에게 적용하여 스포티하고 심플한 디자인의 현대적 여성복 '샤넬 수트'로 간단하고 입기 편한 옷을 모토로 하는 디자인 활동을 시작하여 답답한 속옷이나 장식성이 많은 옷으로부터 여성을 해방하는 실마리를 만들었다. 그야말로 현대 여성복의 시초라 할 수 있겠다.

(실제 그녀가 디자인에 영감을 얻은 것들은 대부분 서민층의 아이템이었는데, 그렇게 모티브를 얻어 탄생한 제품들이 오늘날 명품의 최정점에 있다는 게 엄청난 아이러니.)

간단하고 입기 편한 옷을 모토로 하는 디자인 활동을 시작해서

코르셋등 답답한 속옷이나 장식성이 많은 옷들로 부터 여성을 해방하는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평이 있다.

(여성복에 저지라는 소재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도 샤넬이라고 한다)

 

샤넬 이전 패션

 

 

샤넬 이후 패션

 

 

 

동시대 여성들은 목끝까지 단추를 채우고 허리를 조이는 코르셋의 고통에서 허덕이고 있을 때
그녀는 과감히 코르셋을 벗어 던지고 목을 드러내는 셔츠에 발목이 드러나는 바지를 입음으로써
여성들에게 활동의 자유, 선택의 자유를 주었고,
깔끔한 선과 간결한 이미지 만으로도 최고의 여성성을 끌어낼 수 있다는 패션 철학은
남성의 속옷감으로 사용되던 저지를 훌륭한 여성복 소재로 재탄생시켰다고 한다.

 

 

 

장식이 생략된 옷의 본체에 브레드나 코드의 테두리를 붙이고, 당시에는 보기 드문 크고 작은 색유리나 크리스탈 글라스의 액세서리를 붙이기도 하였다. 간단하고 입기 편하며 활동적이고 여성미가 넘치는 샤넬 스타일은 유행의 변천 속에서도 별로 변함없이 오늘날에도 애용된다.

또, 그녀가 선택한 향수인 샤넬 No.5도 유명하다.

마릴린 먼로가 생전에 자기는 이것만 입고(뿌리고) 잔다고 해서 더 유명해졌다.

(1920년대 초 가브리엘 샤넬은 자신의 이름을 건 향수를 런칭하려고 했고, 당시 유명 조향사였던 Ernest Beaux에게 의뢰하여 몇 가지 샘플을 건네받았다. 그 중 그녀가 선택한 향이 바로 5번이다. 그래서 제품명이 간단하게 5번이 됐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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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손만두

경기도 포천에 있은 만두전문 식당
만두전골이 먹을만 하다.

하지만 이 집의 진짜 메인은 마지막 사진에 있는 해물파전이다.

파삭한 것이 여느 식당의 해물파전과는 전혀 다른 식감의 파전이다.

포천에 간다면 저 해물차전만큼은 꼭 맛보시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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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영만두

만두전문 집이다.
여러 메뉴가 있지만 추천하는 메뉴는

군만두
찐(고기)만두
쫄면(매운맛, 중간맛, 순한맛 중 중간맛)
만두국

이다.

식당 바로 앞에 보용만두 라는 가게가 있으나 본 글에서 소개하는 보영만두가 (내게는) 더 맛있더라.

만두를 좋아하는 분들께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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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너머 남촌

강원도 토속음식 전문
난 인천에서 먹어봤는데 프렌차이즈가 된 것인지 다른 지역에서도 같은 상호가 보인다.

깔끔하고 정갈하면서 토속적인 느낌이 나쁘지 않다. 둘이 가는 것 보다 여럿이 가서 여러 움식이 나오는 메뉴를 주문해서 함께 먹기에 적당한 곳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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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나게장뱍반


전남 여수 게장전문집
여수 아쿠아리움에 가는김에 TV에서 소개한 것을 보고 찾아갔다.

맛있다.
가성비도 좋다.
하지만 역시 TV나온 곳이었다.
TV에 소개된 곳은 사람들 뇌리에 잊혀지기 전까진 가면 안되는 것이었다.

식당에 가서 우리 차례가 올 때까지 그렇게 오래 기다리게 될 줄 미리 알았더라면 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가성비 좋은 맛집임에는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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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복미역
미역국을 메인으로 하는 프렌차이즈 식당


사실 집에서 손쉽게 끓여먹는 미역국을 굳이 식당가서 먹을 필요가 있나 생각했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크게 변함이 없다.

다만 미역국을 좋아하고,
집에서 해먹기 귀찮을 때,
그리고 좀 색다른 미역국을 먹고 싶을 때 이용하면 괜찮을듯 하다.

오복미역의 미역국의 특징은 “들깨가루”에 있다.
미역국에 들깨가류를 넣어 고소함과 미역국 특유의 맛이 어울어져 제법 먹을만 하다.

이미 미역국에 들깨가루를 넣어 끓여먹던 분이 아니라면, 한번쯤 들려 먹어보시길 권한다.

전국 체인점이라 요즘은 여러 지역에 제법 식당이 검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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