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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장면은 언제봐도 감동적이고, 뭉클해진다.

영국의 오스카 쉰들러,

니콜라스 윈튼 (Nicholas Winton)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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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수소차 NEXO

이슈상자 / 2018. 5. 13.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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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경기도 화성의 어느 호텔에서 행사중인걸 봤다.

수소차로, 가격이 7천만원대인가 보다.
전기차와 경쟁에서 어찌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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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 속에서 아래 사진 속 장면을 본다면

이보다 더 소중한 히어로는 없을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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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 홀츠

(풋볼팀 감독)

 1966년 미국 코네티컷 대학 풋볼팀의 조교였던 루 홀츠는 해고통보를 받고 낙담했다.

당시 그의 나이 28세.

아내는 임신 8개월 째였고, 통장잔고는 제로상태였다.

백수생활에 살 길이 막막해진 그는 나날이 우울해져 가는 그에게 아내가 책 한권을 권했다.

책 제목은 ‘크게 생각하는 마술’ ........ (우리나라에서는 '크게 생각할수록 크게 이룬다'는 제목으로 출간)

TV만 보지 말고 책이나 읽고 있으라고...

 

책의 저자는 경영학자이자 자기계발 컨설턴트로 이름을 날린 학자인데,

그 책에는, 

소원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말고 솔직하게 자신의 소원을 적어보고

평생의 목표를 정직하게 적어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백수생활 중 별로 할 일도 없기도 했고, 책의 내용에 감명도 받았기에,

자신의 목표 100가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가 낚서하듯 적은 소원들은,

백악관에서 대통령과 만찬을 즐기기, CBS TV의 ‘투나잇 쇼’에 출연해서 한 시간 동안 떠들고 오기,

로마에 가서 교황을 만나 같이 차 한 잔 마시기, 노틀담대학 풋볼팀 헤드코치 되기, 골프장에서 홀인원 하기,

자동차로 세계 일주하기, 2만피트 상공에서 태평양 바다로 점프하기,

소속팀을 챔피언으로 만들기, 올해의 코치 되기, 아이들 모두를 대학 졸업시키기, 스카이 다이빙 등......

당시 백수였던 그로서는 대부분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터무니없는 목표들이었다.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을 것 같은 소원들이었는데 하나씩 써내려 가면서 뭔가 그의 가슴에 꿈틀거리는 것이 있었다.

아마도 그것들을 적으면서 그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고, 그로인해 어떤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그는 결국 100을 넘어 107가지 소원을 적게 되었고 108번째를 적으려 할 때 부인이 집에 돌아왔다.

그는 자신이 적은 107가지 목표를 부인에게 보여줬다. 그러자 부인은 107번 밑 108번에다가 이렇게 적었다.

 

“취직이나 해라!”

 

쓴웃음과 함께 노트를 한 쪽 귀퉁이에 꽂아두었지만, 이따금씩 그 노트를 보며 자신이 써놓은 리스트를 살펴봤다.

 

그리고 이후 놀라운 일이 생겼다.

'터무니 없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3년 후 그는 윌리엄&메리 대학의 헤드 코치로 임명되었고, 1986년이 되자 실제로 노틀담 대학에 부임했다.

약체였던 노틀담대학은 그해 3837USC팀을 이겼고 2년 만에 최우수 팀이 되어, 홀츠는 올해의 코치로 선정~

노틀담대학은 2008년에 그를 다시 초청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루 홀츠는 백악관에서 레이건 대통령을 만났고, CBS 투나잇쇼에서 출연해 조니 칼슨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책을 읽고 처음 리스트를 작상한 이후 2005년까지 그는 107개 소원(목표) 중 103개의 목표를 달성했다고 하며,

오하이오 주에는 현재 그를 기리는 '명예의 전당'이 있습니다.

그가 리스트에 적힌 목표를 이룰때마다 사진을 찍었는데, 이 명예의 전당에는 그 리스트와 사진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이후 이러한 스토리와 함께 얼마전 우리나라 뉴스에도 소개된 적인 있는 한국인 어머니를 둔 하인즈 워드와 같은 풋볼 대스타를 발굴하는 유능 지도자가 되었고, 한 번 강의에 3~5억원 정도의 강의료를 받을 정도로 유명인이 되었다.

 

 

루 홀츠의 인생에 큰 변화를 준 책.

<크게 생각할수록 크게 이룬다

>에서 저자 데이비드 슈워츠는 우리에게 "크게 생각하는 것의 마술"에 걸려보라고 말한다.

 

사람은 생각하는 크기만큼 커질 수 있다고 말하며, 크게 생각하고 또 자신이 그만큼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자기암시법을 알려준다.

 

(당신의 인생에서)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모두 당신의 생각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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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나와 있는 개헌안을 살펴보면,

위와 같다.

 

그 중 대통령 4년 중임제와 연임제가 나와 있는데 그 차이는 무엇일까.

 

중임제는

4년 + 4년으로 대통령 선거 2번을 모두 이기면 중임할 수 있는데, 핵심은 연속으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지금 4년 대통령하고 선거에서 지더라도 4년 뒤 혹은 8년 뒤에 다시 출마하여 선거에서 이기면 또 대통령을 할 수 있다는 것.

이게 중임의 핵심이다.

 


연임제는

4년 + 4년으로 대통령 선거 2번을 모두 이기면 연임할 수 있는데, 핵심은 연속으로 해야한다는 것이다.

지금 4년 대통령하고 선거에서 지면 끝.

4년 + 4년 대통령을 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연달아서 선거에서 승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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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동탄신도시 '뽀로로파크'에서 자신이 탄생시킨 뽀로로를 만나 반가워하는 최상현 디자이너


■'뽀로로 아빠'를 소개합니다

동래중학교를 거쳐 내성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는 비로소 '미술'에 눈을 뜬다. 1학년 때 실력을 눈여겨본 미술선생님이 디자인을 전공해 보길 제안한 것이다. 삼 형제 중 장남이었던 그는 이거다 싶어 용기를 냈지만, 집안의 엄청난 반대에 직면한다. 얼마 전까지 그의 목표는 '공군사관학교'였다. 어쨌든 역경을 딛고 1993년 동의대 산업디자인학과에 입학해 디자이너로서 첫발을 뗀다.


2000년 10월. 졸업반이던 그는 세 회사에 지원할 기회를 얻는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제조업체 두 곳. 그리고 오콘(OCON)이다. 두 회사가 전공인 제품디자인에 적합한 안정적인 직장이라면, 오콘은 위험 부담이 큰 애니메이션 업체였다.


최상현은 급여도 절반에 불과한 오콘을 선택한다.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재미있고 좋아서'다. 당시 SBS인기가요에 등장한 춤추는 캐릭터 '룰루랄라'를 보고 '정말 재미있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주변에선 "미쳤다!"고 했다. 10년 세월이 흐른 지금, 대학 은사님은 그를 자신의 '5대 제자'에 포함시켰다.


■뽀로로는 2등신!

오콘에 입사한 그는 밤낮없이 일했다. '지방대 출신'에 경력 없는 그로선 쟁쟁한 동료, 선배들을 이기는 길은 노력뿐이었다. 그러던 중 2002년 '디자인연구소'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비밀 작업이 진행되던 그곳에는 PD나 작가뿐 아니라 프랑스인 디자이너와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박사급 디자이너가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임무는 '겨울에 사는 동물들을 주제로 5분짜리 52부작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 전쟁이 시작됐다.

'뽀로로 개발팀'(사실 당시에는 뽀로로란 이름도 없었다)에 합류하고서, 주말이면 동물원에 눌러앉았다. 펭귄과 다른 동물들의 움직임, 그걸 구경하는 아이들 표정을 수도 없이 들여다봤다. 그렇게 탄생한 스케치는 족히 수천 장이 됐고, 세상 빛을 보지 못한 펭귄 캐릭터도 부지기수였다.

마침내 파일럿 모자에 고글을 쓴, 머리가 엄청 큰 꼬마 펭귄이 선배들 작품과 나란히 경쟁했다. 기적이 일어났다. 회사의 선택은 신참 디자이너 최상현의 것이었다. 주인공이 정해졌으니 나머지 친구들 캐릭터는 물론 장난감과 집이며 나무며 각종 배경까지 모두 다 그의 몫이 됐다.

뽀로로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대부분 2등신(정확히는 1.9등신)이다. 머리와 몸이 딱 반반이라는 얘기다. 아이들은 머리 큰 것들이 펭귄처럼 뒤뚱뒤뚱 걷는 걸 그렇게 좋아했다. 자기를 닮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2003년, 여러 동료들과 함께 1년이 넘게 작업한 뽀로로가 처음 전파를 탔다. 첫 방송이 끝나고 자막에 등장한 이름 '디자이너 최상현'. 다 큰 어른이 사무실에서 몰래 울었다. 그 뒤로 뽀로로는 2005년부터 4년간 국내 애니메이션 시청률 1위를 기록했고, 110개국에 수출돼 '월드스타'가 됐다. 



[Q & A]

- 캐릭터 디자이너란 게 좀 생소하다.

▶ 영화는 배우를 캐스팅하면 된다. 애니메이션은 만들어진 배우가 없다. 직접 디자이너가 배우를 만들어야 한다. 외형을 만들어 성격을 심고 배경도 그린다. 캐릭터는 그림만 쓱쓱 잘 그려서 되는 게 아니라 이야기가 담겨야 한다. 캐릭터를 딱 봤을 때 이야기가 묻어나도록 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


- 뽀로로 캐릭터가 선택됐을 때 기분이 어땠나.

▶ 그때는 잘 몰랐다. 기쁘다는 생각보다 '이 많은 일을 어떻게 다 하지'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이게 내 인생에 중요한 일이 되겠구나'라고 직감은 했다.


- 뽀로로는 왜 안경을 씌웠나.

▶ 비행사가 되게 하기 위해서. 안경이 아니라 고글이다. 뽀로로에게 비행사의 꿈을 줬고, 운동을 잘하는 아이로 콘셉트를 잡았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대리만족을 주려 했다. 펭귄은 원래 검은색인데, 아이들이 잘 칠하는 색을 조사해 봤더니 군청색이 많았다. 그래서 파란색 몸에 흰 얼굴을 한 펭귄이 됐다.


제일 그리기 힘든 캐릭터가 뽀로로였나.

▶ 아니다. 여자 아이 '루피'다. 비버의 통통한 볼과 얼굴의 조화를 귀엽게 만들어 내는 게 정말 힘들고 어려웠다.


- 뽀로로의 '여친'(여자친구)'은 루피인가, 아니면 같은 종족인 펭귄 패티인가.

▶ 서로 삼각관계? 그런 것 같다. 다섯 살 내 아들을 보면 아들이 좋아하는 여자친구가 있고, 아들을 좋아하는 여자친구도 있다. 근데 얘들이 서로 그것에 대해 확실히 선을 긋진 않더라.


- 뽀로로 첫 방송 때 왜 울었나.

▶ 이 얘기는 좀 빼 달라. 제작진 크레딧에서 내 이름을 본 순간, 월드컵 4강 진출 때보다 더 신났고 감동을 받았다. 1초 남짓 내 이름이 지나가는데, 회사 막내 디자이너로서 받았던 설움과 고생했던 감정들이 막 올라오더라. 막 눈물이 나더라. 뽀로로가 완성되고 나서 너무 힘들어서 사실 회사를 나가려고 마음먹었다.


- 대박 난 뽀로로를 디자인했으니 돈 좀 벌었겠다.

▶ 한마디로 아니다. 저작권은 회사에 있고, 디자이너는 월급을 받을 뿐이다. 경력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수가 생각하시는 것 보다 많지는 않다. 처음 나온 뽀로로 봉제인형을 사러 마트에 갔는데 품절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 느낀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후에 내가 디자인한 소품들이 줄줄이 상품이 돼 나왔다. 그런 건 그저 내 포트폴리오를 채우는 내용일 뿐이다.


- 뽀로로는 최상현에게 뭔가.

▶ 샘나고 좋은 존재다. 내 자식이고 내 새끼다. 솔직히 뽀로로 덕 좀 봤다. 사랑하는 아내와의 결혼을 승낙받으러 처가에 갔을 때 '뽀로로를 디자인했다'고 했더니 다행히 애를 키우던 처형이 무지 좋아해 주셨다. 어딜 가도 "뽀로로 디자인했다"고 하면 다 통한다.


- 이젠 세계인의 뽀로로가 됐다.

▶ 한 가족이 이민을 갔단다. 유치원에 간 아이가 동양인이라 무시를 당했는데. "나 뽀로로 만든 나라에서 왔어"라고 했더니 갑자기 인기가 좋아졌고 잘 적응할 수 있었단다. 인터넷에서 그 글을 보고 정말 기뻤다.




그리고 뽀로로를 만든 회사 대표의 인터뷰


국내 토종 캐릭터로 연간 380억의 매출을 내고 있는 '뽀로로'를 탄생시킨 (주)아이코닉스 최종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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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들르는 커뮤니티에 한 글을 읽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한 이의 담담하면서도 남일 같지 않은 글이었다.

평범한 일상 속, 우리 모두에게도 이미 있었을법한 흔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글쓴이도 그렇게 무심코 지나쳤는데 그게 그렇게 어머님과의 마지막이 되어 자꾸 생각난다 하는 부분에...

갑자기 어머님이 보고 싶어지는 글이었다.

 

 

 

3/9(금) 일을 마치고 친구들과 저녁에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날은 그렇게 늦게까지 놀다가 새벽 1시 30분에 집에 들어갔네요.


집에 들어가자 어머니께서 일어나셨는지 아들 잘 다녀왔냐며 반겨주셨어요.

이때까지만 해도 어머니는 괜찮으셨는데 말이죠.. (이미 많이 아프셨지만 내색을 안하셨을지도..)

어머니는 3일전부터 목감기가 심하게 들으셔서 주무실때마다 목에서 쇳소리가 크게 나셨어요.

어머니가 쇳소리를 낼때마다 못난 아들인 저는 병원에좀 다녀오시라, 주사좀 맞으시라 말만했었죠.

(하루는 그 쇳소리 때문에 잠을 못자겠다고 어머니한테 화도냈었던 것 같네요..)


아무튼 다시 새벽 3/10(토) 새벽 1시 30분에 집에 들어왔을 때,

어머니께서는 밥솥에 쌀을 앉히고 계셨어요. 자고 일어나면 저 밥을 해주시기 위해서였겠죠.

제가 대충씻고 침대에 눕자 어머니께서도 침대옆자리에 누우셨고, 저와 어머니는 평범한 대화를 나눴어요. 


"엄마 내일 삼겹살 구워먹기로했는데 사다놨어?" 

"응 아들 사다놨어 아침에 맛있게 구워줄게."

"근데 엄마 목감기는 어때? 병원에서 뭐라그래?"

"아.. 폐렴인거 같다고 큰병원에가서 진찰받고 입원하라고 하네?" 

"엄마 근데왜 지금 집에있어? 병원안가고? 왜그렇게 미련해?"

"아들이랑 상의하고 가려고했지..." (아마 집에 가족 밥챙겨줄 사람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네요..)

"엄마는 왜그렇게 답답해? 그런말들었으면 병원엘 바로갔어야지!!"

"근데 아들, 엄마 숨쉬는게 좀 답답해.."

"엄마 지금 응급실가! 빨리! 아빠차 타고 같이가."

"알았어"


이렇게 어머니와 아버지는 같이 병원 응급실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피곤하다는 알량한 이유.. 내 이기적인 생각.. 게으름 때문에

"설마 무슨일 있겠어?" 하고 생각하며 어머니를 따라가지 않고 그냥 잠을 잤습니다...


이게 어머니와 저의 마지막이였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응급실로 차를타고 가시면서도 대화를 하셨다고 합니다.

이런저런 얘기들.. 그때까지만해도 아버지도 어머니가 이렇게 될줄은 모르셨다네요..


병원 응급실 주차장에 내리고 응급실까지 걸어가는 거리 100m

어머니는 힘들다고 아버지에게 손을 잡아달라고 했답니다.

그렇게 손을 잡고 부축해서 걸어가는 도중, 어머니가 쓰러지셨습니다.

아버지는 당황해서 쓰러진 어머니를 업고 가시려고 했으나..

당뇨를 오랫동안 앓아오셨고 투석도 오랫동안 하고 계신 아버지는 그럴 기력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병원 정문에 있는 휠체어를 가져오셨고, 그 휠체어에 어머니를 태우려해봤지만..

그 조차도 여의치 못했던 것 같습니다.. 휠체어를 가져다 놓고 그때서야 응급실에 들어가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렇게 쓰러지신 어머니가 응급실에 들어가기까지는 5분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소생실에 들어가 심폐소생술은 1시간가까이 했지만, 소생되지 않아 의사가

아버지를 조심스럽게 불렀습니다. 

"아버님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 아니 그게 무슨 소리에요? 방금전까지 여기올때까지만 해도 나랑 얘기하면서 왔는데!!"

"죄송합니다.. 하지만 좀 더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20~30분간 더 심폐소생술이 진행되었지만..

끝내 어머니는 일어나지 못하셨습니다..

어머니 사망시각 : 3/10(토) 새벽 3시 47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순간에도 아무것도 모른채 집에서 자고있었습니다.

경황없는 아버지께서 저에게 전화했지만 전 그전화도 자느라 받지 못했죠.

4시가좀 넘은시간 아버지께서 자는 절 깨우셨습니다.

"00아.. 엄마가 죽었어.."


자다 일어나서 들은 얘기가 너무 현실같지 않아서 전 이게 꿈이라고 착각했습니다.

내가 엄마아프다고 생각하고 자서 꿈에서 이런 최악의 상황을 꾸나..?

이건 꿈이겠지.. 꿈일거야.. 이렇게 생각하면서 1분정도 정신을 못차렸던 것 같네요.

곧 정신을 차리고 나오는 눈물을 삼키며 옷을 챙겨입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소생실에 누워계신 어머니를 보자 정말 현실이 아닌 것 같았어요.

어머니 몸이 아직 따뜻해서.. 의사에게 어머니 살아계신거 아니냐고 외쳤어요.


1시간 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때 쯤

사망진단서를 떼라는 간호사분의 말이 있어서 원무과로 갔습니다.

사인은 '급성 심근경색' 이라고 적혀있었구요.


이후에는.. 상주로써 장례식을 치르고..

어머니를 입관시키고.. 발인하고.. 장지에가서 어머니를 보내드리기까지..

상을 치르는 내내 어머니께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요.

내가 엄마랑 함께 응급실에 갔었다면.. 엄마가 쓰러지는 순간 바로 업고 응급실에 들어갔을텐데..

그럼 우리 엄마 살았을텐데.. 아니 내가 그날 조금 일찍들어왔더라면..

어머니가 돌아가시전까지의 저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다 후회되고 죄송했어요. 


외동아들이라고 오냐오냐 저만 챙겨주시던 어머니..

이렇게 못난아들때문에 먼저 가셨네요.

 가슴속 한 부분이 뻥뚫려나간 것 같은 감정이.. 이런 것이라는 걸 이제 좀 알 것 같아요.


사실 이런곳에 이런 글을 쓰는것 조차도 이게 맞는건가.. 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렇더라도 그냥 제 마음이 누군가에게 저희 불쌍한 어머니..

저의 불효막심한 행동들을 고백하고 싶었습니다.


긴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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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맹, 그들의 이야기)

 

(난생 처음으로 색깔을 본 색맹 형제)

 

 

 

 

(색맹 아빠가 처음으로 색을 봤을 때)

 

 

 

(66세에 처음으로 색을 본 할아버지)


 

그리고

 

색을 처음 본 어느 한국인

 

 

 

평생을 제대로 된 색을 보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증상을 색맹이라 부른다.

위 영상 속 어떤 분이 이렇게 말했다.

받아들였고,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이 안경을 통해 세상의 색을 보기 전까지는...)

 

개인적으로 66세 할아버지가 생일을 맞아 선물로 안경을 받아 색을 본 뒤 감격해 하는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다.

그 오랜 시간을 너무 많은 것을 모르고, 놓치고 살았다는 것 때문일지...

상당수의 사람들이 눈물을 흘린다.

 

어떠한 의미에서 생각하면,

예술가들이 우리가 보지 못한 세상을 예술로 표현하여 보여줄 때

감동을 받는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 조금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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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경기에서,
그것도 마지막선수의 통과 기록으로 승패를 가르는 경기에서,
둘이서만 전력질주?

그래놓고 경기 후 이런 인터뷰..



전날 이상화 선수의 멋진 경기와
경기 후 일본의 고다이라 선수와의 멋진 스포츠정신이 살아있는 모습을 본 뒤라 더욱 대비되는 추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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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짓은
제 돈 쓰고 욕먹는 짓인데...


이 경우는 재고처리비용을 줄이는 돈벌이를 가장한 것일까...



(관련기사)
http://m.busan.com/m/News/view.jsp?newsId=20180213000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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